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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학술활동-유물돋보기> 무진조천별장첩(戊辰朝天別章帖)

번호
 14
작성자
 박물관 학예연구실
작성일
 2013.04.12
조회수
 793

 

무진조천별장첩(戊辰朝天別章帖)

 

김원규(박물관 학예연구원)

무진조천별장첩이란?

조선시대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거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부임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使行] 사람에게 송별시를 써 주었다. 그리고 송별시들을 모아서 만든 첩을 별장첩(別章帖)이라고 했다. 무진조천별장첩은 별장첩은 제목그대로 무진년(戊辰年), 1628년에 천자에게 인사[朝天’’를 하러 가는 이를 송별하는 시를 모아 만든 시첩(詩帖)이다. 1628년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던 해이다. 따라서 무진조천별장첩은 명나라 새 황제의 등극(登極)을 축하하기 위한 조선사절단에 소속된 누군가를 위해 지은 시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당시 사절단에는 정사(正使) 한여직(韓汝溭), 부사(副使) 민성휘(閔聖徽), 서장관(書狀官) 김성발(金聲發)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 첩은 그 중 부사로 참여한 민성휘를 위한 송별시첩이다.

무진조천별장첩은 천()()() 세 첩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국인 한 명을 포함한 94명의 글 96편을 싣고 있다. 각 첩 머리에는 명나라 관리 장응회(莊應會)의 글과 거기에 화답한 민성휘, 한여직, 서장관 송○○의 글을 실었다. 나머지 글들은 정치적인 비중의 높낮이와 연령의 고하에 따라 배열하였다.

 

무진년의 사행길

17세기 초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추장 누르하치는 만주지역의 여진인들을 통합하고 칸의 자리(1616)에 오른 후, 국호를 후금(後金, 후에 )이라 하였다. 1619년에는 요동(遼東)으로 진출하고, 심양(瀋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민성휘가 등극사절로 갈 무렵(1628)은 요동이 청()의 지배하에 들어 간지 1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때문에 조선사신단은 북경사행 때 활용하던 요동육로는 더 이상 이용할 수 없고, 평양을 출발해 중국 4,000여 리의 멀고 험한 서해 뱃길로 중국의 등주(登州)까지 간 다음 다시 육로(陸路)로 북경까지 가야만 했다. 그런데 등주에서 북경까지의 거리만 해도 서울에서 육로로 북경까지 가던 거리에 가까우니, 험난한 뱃길은 이전에 비해 덤으로 하는 고생길이었다. 무진조천별장첩에 보면 이 뱃길을 당시 사람들은 목도(木道)라고 불렀는데, 여러 편들의 시에서 그 고생길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고 있다. 실제로 민성휘에 앞서 4년 전에 이 길을 이용해 북경을 다녀온 이덕형(李德馨)은 다음과 같이 그 고초를 말하고 있다.

 

바다 건너는 괴로움 나는 벌써 맛보았지

혼이 나서 지금도 방향이 헛갈린다네

물과 하늘이 분간 안될 땐 별을 보았고

목숨이 위험할 땐 여랑(女娘)에게 제사지냈지

목도(木道)가 가장 위험하고 황도(皇島)는 험하며

뱃사공은 철산(鐵山) 앞바다를 더욱 꺼리지

……(9, 이덕형)

  실제로 민성휘도 이 항로에서 괴로움을 맛보게 된다. 무진년 배를 타고 북경에 가던 중 황성도(皇城島)에서 역풍을 만나 철산(鐵山)곶으로 후퇴했다. 밤이 되자 비바람이 크게 일고 파도가 하늘에 닿았다. 배를 탄 사람들이 모두 멀미를 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기를, “생사는 하늘에 달렸다. 나는 명령을 받은 날 이미 목숨을 나라에 바쳤으니, 혹 잘못된다고 해도 달게 받겠다”(연려실기술29, 민성휘조)라고 했다. 그 고초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무진조천별장첩의 내용과 가치

송별시는 보통 가볍게 즉흥적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며, 내용 역시 특별한 것 없이 주인공의 능력을 칭송하거나 무사히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올 것을 바라는 것 등 천편일률적이다. 무진조천별장첩의 시 내용도 대부분이 외교사절로서의 민성휘의 능력을 칭송하고 먼 길에 무사히, 그리고 수임한 일을 잘 마치고 돌아오라는 내용 등이다.

아래의 시는 그 전형적인 시 중의 한 편이다.

 

조정의 신하 중 뛰어난 자를 뽑았으니

화려한 글재주 누가 비교하리오

함지에서 아름다운 해가 솟아 오르니

뱃길은 은하수에 닿았네

오랑캐의 운명 어찌 오래 가리

황제의 위엄은 아무도 감히 어쩌지 못하니

평생 쌓은 충성과 신의가 있으니

풍파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네(7, 이홍주)

 

그러나 무진조천별장첩에는 이렇게 상투적인 시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행의 본래 목적은 외교에 있지만, 그 과정은 또 하나의 여행이다. 때문에 지나는 곳의 풍물, 역사, 지리 등을 읊은 글들도 다수 있고(<>에 실린 이호민, 이덕형, 신흠 등의 시), 또한 조선에서 구하기 힘든 중국의 희귀한 서적이나 물건 등을 구해다 줄 것 등을 청하거나(<>에 실린 신익성, 윤운구 등의 시), 중국의 풍물을 시로 지어 오라고 부탁(<>에 실린 나만갑의 시)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을 통하여 이들이 당시 문화의 중심이었던 중국문화를 동경했고, 사행(使行)이 단순한 외교 수단뿐만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수입의 창구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는 만주족 청이 흥기하고 명이 기울어가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을 오랑캐라고 애써 무시하고 여전히 명에 대한 사대에 집착하였다. 특히 무진조천별장첩은 새로운 황제의 등극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각 시들에는 새 황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가득 차 있다. 앞서 제시한 이홍주의 시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기대와는 다르게 새롭게 등극한 황제는 명의 마지막 황제, 즉 망국의 황제가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무진조천별장첩에 실린 시들을 통해 당시 조선사대부들의 역사인식과 시대인식을 엿볼 수가 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조선은 왜란과 호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그것은 조선의 내부사정에도 기인하겠지만, 어쩌면 이와 같은 격변하던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한 무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지도층의 무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 첩에 실린 각각의 시들은 당시의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는 역사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첩은 문학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여기 실린 백여 편에 달하는 송별시는 이별을 앞둔 조선 사대부들의 문화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명 별장문학(別章文學)’이라는 장르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들 시를 통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화형태와 별장문학을 연구하는데도 좋은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무진조천별장첩의 가치는 글씨에 있다. 17세기 초의 글씨가 지금 흔하지 않은데, 이 첩은 백 여명에 달하는 고관과 명사들의 글씨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들 글씨들은 필자가 확인되는 진본들이다. 때문에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한국서예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성휘((閔聖徽, 15821647)는 누구인가?

그는 여흥인(驪興人)으로 자는 사상(士尙), 호는 용졸당(用拙堂)이다. 1605년에 사마시(司馬試)1609년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1623년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인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출세의 길을 걸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조정을 둘로 나누어,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갔다. 민성휘가 마침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있었는데, 명령을 수행하고 군수물자를 동원하는데 빈틈이 없었다. 당시 정승(政丞)으로 분조에 따라갔던 이원익(李元翼)과 신흠(申欽)은 그의 능력에 탄복했다고 한다. 약 백년쯤 후 영조(英祖) 때 교리(校理) 원경하(元景夏)가 인조와 효종(孝宗) 시대의 인물을 평가하면서 뛰어난 행정가에 민성휘를 꼽고 있는 것으로도, 그의 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민성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그것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정명수(鄭命壽)는 강홍립(姜弘立) 휘하의 군대로 출병하였다가 청나라의 포로가 되자 청나라에 붙어서 출세한 인물이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 청 장수 용골대(龍骨大)는 조선에 왕래할 때 반드시 정명수를 데리고 다녔다. 그런데 정명수가 통역을 하면서 중간에서 말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민성휘가 정명수를 꾸짖어 말하기를, “양국이 화의를 했으면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데, 너로 인하여 불미스런 일이 자꾸 생기니 반드시 네 목을 베어 후환을 없애리라고 했다. 그 후 1645년 정명수가 청의 칙사(勅使)로 왔다. 민성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그를 맞이하게 되었다. 서울로 들어오는 날 길가에서 쉬고 있는데, 정명수를 따라 온 통역이 말을 탄 채 민성휘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민성휘는 그 자리에서 그 통역을 매로 쳐 죽였다. 정명수가 전에는 내 머리를 베려하더니 이제는 나를 따르는 자를 죽이는구나, 황제에게 고하겠다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안주(安州)에 이르자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강하고 용맹스러운 자는 오직 그 사람뿐이다라고 했다. 민성휘의 과감함과 강직함을 보여주는 이러한 사례는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647년 정해년 민성휘는 사은부사가 되어 두 번째 사행을 가다가 중로(中路)에서 병이 들어, 북경(北京)에 닿자 곧 죽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사관(史官)은 민성휘를 평가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사은부사 민성휘가 북경에서 죽었다. 그는 사람됨이 영민하고 재주와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하고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다(인조실록49 26년 정월 무오).

  * 이 글은 경남대학교 박물관 간행 <汗馬古典叢書> 4, 戊辰朝天別章帖해제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음.